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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남원 여행] 일제가 한밤중에 정으로 쪼아버린 이성계의 승전보, 황산대첩비지

안녕하세요!

오늘은 전북 남원 여행 중 다녀온 뜻깊은 역사 유적지,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단순히 옛 비석이 있는 곳이 아니라,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의 위대한 승리와 광복 직전 일제의 처참한 만행이 동시에 서려 있는 곳이라 마음이 묵직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보실 것은

1.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걸어라, 하마비(下馬碑)

유적지 입구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늠름한 하마비입니다. 비석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글자가 선명합니다.

무슨 뜻인지 하나하나 뜯어보니 당시의 엄격함이 느껴지더군요.

대소인원(大小人員): 지위가 높은 사람(대)이나 낮은 사람(소)이나, 모든 사람들(인원)은

개(皆): [ 예외 없이 모두 다! ]

하마(下馬): 말에서 내려라.

즉, "여기서부터는 왕족이든 평민이든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성역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라는 것이죠.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교육용으로 좋은 것 같아요.

2. 바위에 새긴 승리의 기록, 어휘각(御諱閣)

조금 옆으로 가면 '어휘각'이라는 전각과 거대한 바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휘각이란? '임금(御)의 이름(諱)을 모신 집(閣)'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놀라운 스토리가 숨어 있습니다.

천년을 가는 맹세, 동공일체(同功一體)

때는 1380년, 이성계 장군은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칩니다(황산대첩). 그리고 이듬해인 1381년, 승리의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자연 암석에 글을 새기게 합니다.

 

놀라운 점은 이성계 장군 혼자만의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몸처럼 싸워 이룬 승리다" (동공일체, 同功一體)

이성계는 자신(도원수)뿐만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한 8명의 장수(팔원수)와 4명의 종사관(사종사)의 이름을 모두 바위에 새기게 했습니다.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된 리더십이 바로 이런 '팀워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3. 씻을 수 없는 상처, 일제의 만행

하지만 아름다운 승리의 역사는 565년 뒤, 끔찍한 상처를 입습니다.

1945년 1월 17일 새벽, 광복을 불과 7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패망을 감지한 일제 경찰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패배한(왜구 소탕) 역사를 지우기 위해 야밤에 이곳을 급습했습니다.

그들은 다이너마이트로 비석을 폭파하고, 그것도 모자라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정(철 징)으로 일일이 쪼아서 뭉개버렸습니다.

사진 속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은 세월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지우려 했던 일제의 칼자국입니다. 현재의 전각은 1973년에 다시 세워져 이 상처 입은 바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비록 글씨는 뭉개졌지만, 그들이 훼손하려 했던 이성계의 업적과 선조들의 호국 정신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우리 가슴에 남았습니다.

옆에 있는 황산대첩비는 선조 8년(1575년)에 김귀영이 왕명으로 지은 글이라고 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 장소를 잊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었죠.

남원 여행을 계획 중이시라면, 화려한 관광지뿐만 아니라 이곳 황산대첩비지에 들러보시는 건 어떨까요? 바위에 남겨진 상처를 어루만지며 우리 역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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