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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TV

벌거벗은 한국사 4회 궁예와 왕건 고려 전에 태봉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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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년 태봉이란 나라가 등장한다.

676년 삼국을 통일 한 신라

그런데 다시 3개의 나라로 쪼개지는데

후백제, 신라, 태봉이란 나라로 나뉘게 된다.

이때를 후삼국시대라고 한다.

이름도 낯설은 태봉, 태봉의 왕은 누구인가

바로 궁예다.

궁예는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대 부하들과 함께 싸우며 큰 나라를 만들었다.

그러나 부하들이 따르던 장군에서 결국 부하에게 쫓겨나게 된 왕이 되었다.

궁예는 신라 왕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불길한 운을 갖고 태어나 죽이려고 하는데 궁예의 유모가 궁예를 데리고 떠나 몰래 키우게 된다.

그러나 궁예는 어릴적 장난꾸러기 사고뭉치로 자라, 유모는 궁예의 출생의 비밀을 말해준다.

궁예는 스스로 출가하겠다고 하고 절에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다가 궁예는 절을 떠나게 되는데, 당시 대혼돈의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를 바로 잡고 싶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고를 바닥낸 왕실과 귀족들

일부 귀족은 노비를 3000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심지어 금을 입힌 집이 있을 정도로 지배계층의 방탕함에 백성들은 분노하고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궁예는 자신이 세력을 모으면 신라가 아닌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야심을 키우기 위해 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호족을 찾아갔다.

궁예가 찾아간 호족은 양길이다.

양길은 궁예에게 군대를 주고 동쪽 땅을 차지하라고 한다.

궁예가 이끄는 600명의 군대에서 3500명의 궁예의 군사가 생겨난다.

군사의 추대를 받아 장군으로 추대받게 된다.

패서지방의 호족은 궁예에게 항복하게 된다.

왕건은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로 궁예를 만나게 된다.

궁예는 왕건에게 자신의 세울 나라의 성을 쌓는 일을 시킨다.

궁예는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양길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궁예는 왕건의 도움을 받아 양길과 싸우게 된다.

901년 구호를 정하고 건국을 선포한다.

송악을 도읍으로 삼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나라 이름은 고려로 정했는데, 교과서에는 후고구려라고 되어 있는데

장수왕 고구려를 고려로 불렀다.

궁예의 목표는 후백제와 신라를 공격해서 삼국을 통일하는 것인데,

궁예는 나주를 정복하려한다.

903년 난적 후백제를 공격한다.

궁예는 왕건을 시켜 나주지역을 정복하게 된다.

왕건은 금성을 지배하고 이름을 나주로 정했다.

궁예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한다.

백성들, 호족들 모두 불만을 가득 갖게 되었다.

궁예는 고려를 마진, 태봉으로 국가의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점 달라지는 궁예의 모습들이 비추기 시작한다.

궁예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격화한다.

바로 미륵불

미래에서 온 부처 자신이 부처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에 더욱 더 강한 왕권 강화 수단으로 관심법을 들고 나오게 된다.

명망높은 승려 석총이 고언하지만, 철퇴로 죽이게 된다.

백성들에게 향한 궁예의 관신법

왕건은 나주가 후백제의 공격을 받게 되어 나주로 내려가게 된다.

덕진포 전투에서 견훤과 싸우게 된다.

912년 왕건은 나주를 지키게 된다.

궁예는 왕건을 제2의 권력자 시중에 자리를 주게 된다.

궁예의 총애를 받는 왕건

아첨꾼 아지태의 사건으로 왕건 편에 사람들이 몰리게 된다.

그래서 왕건파와 궁예파로 나뉘게 된다.

궁예는 왕건을 의심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궁예는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게 된다.

궁예의 신하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고 왕건을 찾아간다.

왕건은 거부한다.

아무리 포악해도 충심을 가져야 할 신하가 군주를 칠 순 없소.

왕건의 부인 유씨가

갑옷을 들고나와

대의를 세우고 폭군을 갈아내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화가 나는데 어찌 대장부가 가만있으실 수 있습니까?

왕건은 갑옷을 입고 혁명이 시작된다.

왕건이 갑옷을 입고 나오자 궁 앞에 1만명의 국민들이 나와서 환호했다.

그리고 다음날 918년 왕건의 고려가 선포된다.

궁예는 산에서 이틀간 피신하다 보리를 훔쳐먹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고 한다.

시대를 호령한 장군이지만, 폭군으로 기억되는 궁예.

역사 기록은 비판적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마지막 폭군의 모습이 궁예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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