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여행

[나주여행] 나주읍성 동쪽 성문 동점문

반응형

[나주

안녕하세요.

오늘은 나주읍성의 성문 중에서 동쪽에 있는 동문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전라도의 어원은 전주와 나주를 지칭하는 단어로 만들어 질 정

 
 

도로 전라남도 나주는 나주의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이곳에는 읍성이 있었는데요.

 
 
 

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4개의 문 중에서 하나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전체 4개를 복원해서 나주읍성 성문을 보실 수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나주읍성(羅州邑城))는 사적 제337호로, 전라남도 나주시 성북동·교동 일대에 있는 성입니다.

나주읍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성으로 조선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10~1920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4대문(동점문, 영금문, 남고문, 북망문)과 성벽에 대한 헐어 없애는 작업이 빠른 속도로 행해졌고, 그 터는 식민통치 건물지, 일반대지, 혹은 도로망 등으로 전용되었습니다.

 
 

후에 나주읍성 재건사업으로 4개의 성문을 복원하였습니다.

 
 
 

주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나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 성종2년(983년) 나주목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도시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 태조의 나주공략, 현종 1년(1010년)에 거란의 침입시 현종이 남순하여 10여일간 머물다가 환도한 사실 등은 지방 중심 도시로서 나주의 비중과 함께 나주읍성의 존재 가능성을 추론해 볼수 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김경손전이다. 고려 고종 24년(1237)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수중에 넣고 나주로 진출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 하였다는 기록에 현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나주성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가 갖추어져 있었음은 정도전의 등나주동 루유부로서 에서 확인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 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 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 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대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이 겁쳐 세조 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후 나주목사 김계희(1457. 8. 11~59. 11. 21 재임)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되었다.

한편 나주읍성은 일제강정기에 훼철되기 시작하였다가. 1913년 7월 23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나주인들이 남문의 보존을 희망하나 이미 성벽의 태반이 없어졌고 동문은 1912년에 붕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신문 1916년 10월 1일자에 도로공사 등의 영향으로 동, 서, 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문만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0년에 제작된 속수나주지에 남문이 남아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1916년 10월 ~ 1920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성벽은 잔돌 끼움 쌓기방식으로 쌓았다. 현재 성벽의 바깔부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둘래가 3,679m 면적은 974,390m2이다.

 

여행] 나주읍성 동쪽 성문 동점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