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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여행

[김제여행] 김제 옛 관아(동헌, 내아, 피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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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관아를 방문했습니다.

 

관아는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에 설치를 했다고 합니다.

주민 속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좋은 수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이유는 정치하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치는 나라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정치가 좋은 정치가 있고, 나쁜 정치가 있습니다.

누가 좋은 정치고, 누가 나쁜 정치일까요?

조선시대 500년 동안 편을 나눠 서로 싸웠습니다.

박터지게 싸우다가 중국과 일본에게 공격당하다 나라를 잃어 버릴 뻔했습니다.

병자호란때는 왕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서 청 태종에게 머리를 바닥에 찧어 이마에 피가 나 흘릴 정도로 모욕적인 삼개구고두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3번 무릎 끊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식이라고 하는데요.

때는 겨울이었고, 맨바닥에 아주 치욕적인 장면이지만 어느 정도 순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정치는 바뀌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렇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충신은 보이지 않고, 간신만 득실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는 이완용 뿐일까요?

이완용 반대편에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 하던 사람도 비슷합니다.

역사는 돌고 돌아 다시 그 자리를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존경받는 정치인들이 많이 생겨나길 기원해 봅니다.

김제 옛 관아(동헌, 내아)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로서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현재 김제관아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실례가 되고 있다.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의 경우 1667년(현종8년) 김제 군수 민도가 처음세우고 이를 근민헌이라 칭하였으며 1699년(숙종 25년)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1667년 이전에 이미 김제 동헌에 대한 시문이 전재지고 있어, 건립 시기는 수령의 살림채인 내아(내동헌)와 함께 155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633년(인조11년)에 지어진 피금각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 재임시 동헌에서 임무를 마친 후 가야금과 바둑, 서책을 읽으며 휴식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김제 관아는 현존하는 동헌, 내아, 피금각 이외에 외삼문, 내삼문, 호적고, 사령청동이 김제지방도(1872년)에 보이며 외삼문의 경우 중충 문루형식에 상층엔 징벽루, 하층엔 벽지아문이라 편액하였다.

 
 

김제 내아

내아는 조선시대에 수령이 가족과 함께 살았던 생활공간이다.

김제 내아는 현종 8년 1667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2개의 온돌방과 부엌이 있고, 오른쪽에는 다락이 딸린 부엌과 1개의 온돌방이 있다.

대청마루 앞쪽이 뒤쪽에 비해 낮다.

이는 문턱을 낮춰서 내아를 드라드는 사람들이 수시로 편하게 오가도록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내아는 관아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김제 내아는 동헌의 바로 뒤편에 있다.

원래 여러 부속 건물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ㄷ 자형의 안채만 남아 있다.

이 내아는 동헌과 함께 남아 있어 관아 건축물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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